폴 고갱(Paul Gauguin)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탈인상주의 화가이자 판화작가로,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고갱은 장래에 미술의 발전을 주도할 것으로 예견된 예술가로, 그의 작품은 독특한 스타일과 표현력으로 높게 평가됩니다. 폴 고갱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가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년기의 경험
폴 고갱은 1848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습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고,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페루로 가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와 고갱, 누나만이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의 외종조부는 차기 대통령직이 확실한 정치인이었고, 그의 식구들을 환대하였습니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 문명의 독특한 도자기, 그리고 젊었을 적 수습 도선사로 각 항구를 돌며 보고 들은 문물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습니다.
증권맨에서 화가로
그는 학교를 졸업 후 전업 화가로 뛰어들기 전에는 도선사로 있다가 1871년 모친상을 당한 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사에 취직, 주식중개인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결혼 후 생활이 안정되어 주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주말화가로써 생활할 수 있었고, 35세에 정식 화가로 전향하였습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후에 마르티니크 생피에르섬에서 몇 달 머물기도 했는데 이때 자신의 예술적 스타일을 찾는 계기가 됩니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삭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의 인연
고흐의 동생인 테오와의 인연으로 고흐와도 친분을 맺게 된 고갱은 테오의 주선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노란 집에서 같이 작품활동을 하게 됩니다.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고흐는 고갱을 환영하는 의미로 그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둘은 9주 동안 같이 작업하며 지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습니다. 고갱이 아를을 떠나면서 둘 사이에 연락은 이어졌지만 서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타히티에 파리, 다시 타히티로
1890년, 고갱은 다음 작품 활동을 타히티에서 하는 것을 구상하고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의 열대 우림과 원시적인 문화를 상상했지만,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고갱에게 영감을 주지 못했고, 결국 고갱은 에드몽 드 보비와 같은 사진가를 연출 사진을 빌려 이상화된 원시 자연 속의 여인을 그렸습니다. 고갱은 첫 방문 당시였던 44세에 13세였던 테하아마나 결혼했습니다. 고갱은 13살의 아내를 모델로 한 누드화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를 그렸습니다. 그의 타히티 여성들과의 관계는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았습니다. 타히티 생활을 마친 고갱은 원주민 아내를 아무 죄책감 없이 버리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타히티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려 전시회에 출품하였고, 1894년 11월 열린 듀랑-루엘 전시회에 출품한 고갱의 작품 40여 점 가운데 11점이 팔리며 고갱은 드디어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11월의 전시회가 끝나고 듀랑-루엘의 후원이 계속될 지는 미지수였습니다. 게다가 미국 시장 진출은 실패하였고 다음해에도 전시를 열어준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제때 작품을 주지 못해 무산되었습니다. 이 즈음 고갱은 아내와 이혼 후 1895년 다시 타히티로 떠나게 됩니다. 타히티에 도착한 그는 널찍한 화실을 얻었고, 내키는 대로 화실과 프랑스의 자신의 집을 오가며 자유롭게 작품 생활을 했습니다.
비극적 결말
고갱은 1897년 4월 그가 아끼던 딸이 죽고 재정난에 시달리는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해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제작하였습니다. 고갱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대작임을 직감하였습니다. 후에 마리키즈 제도로 떠나 풍경과 인물을 그리고 여러 습작을 하며 보냈지만, 고소를 당하는 등 안 좋은 일이 계속 발생하였고 기존의 병세도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고갱은 고통을 덜기 위해 모르핀에 손을 댔고 결국 중독되었습니다. 결국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사망하였습니다. 폴 고갱은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예술가로 기억됩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한 시각과 표현력으로 인류의 본성과 존재에 대한 탐구를 이어갑니다. 그의 실험적인 접근과 문화적인 다양성은 현대 미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촉진했습니다. 고갱의 영원한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미술가와 예술애호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